행복하다는 것은 소망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 헤르만 헤세
수년 째 부터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영어강좌를 열었다. 한국학생과 국제학생이 반반정도 구성되는 학생비율 구성이었다. 개인별 편차는 분명히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영미권 및 유럽 학생들이 확실히 아시아권 학생들 보다는 매사에 적극적이다. 한국학생들이 ‘학점 이수’에 상대적으로 민감하다면, 영미권, 유럽 그리고 남미의 학생들은 그리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올해 부터 Global MBA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독일, 벨기에 등 유럽 지역과 모로코, 리비아 등 중동 및 북아프리카 등 전 세계적으로 약 20여개 국적을 지닌 그야말로, ‘국제적 수업’이다. 또한 이들은 각자의 나라에서 기자, 엔지니어, 컨설턴트, 교사 등 다양한 사회경험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들 중 상당수는 정부초청 장학생으로 온 관계로 상당히 우수한 자원들이다.
국제학생들의 경우 학부과정 학생들이 주로 20대 초반 이며, MBA 과정 학생들은 주로 20대 후반~30대 초반 학생들이다. 이들이 한국 학생들과 다른점을 생각나는데로 열거하자면, 첫째, 적극적으로 질문한다. 수업 진도 및 당일 일정에 영향이 있을 정도로 질문한다. 둘째,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표현하는데 거침이 없다. 셋째, 요구할 것은 당당하게 그리고 세부적으로 요구한다. 넷째, 자신의 삶에 대한 밑그림을 가지고 있다. 다섯째, 그렇기에 자신의 미래와 꿈에 대해 이야기하고 소개하는데 거침이 없다.
강의실 안에서만이 아니라, 학생들과 방문한 기업이나 기업활동 관련 기관 현장에서도 국제학생들의 경우, 끊임없이 질문이 계속 이어진다. 중간에 일정한 관여를 하지 않으면 시간관리가 어려워지는 상황을 자주 초래하곤 한다.
국제학생들이 집요하게 질문을 하고, 자신의 꿈과 미래의 삶에 대해 거침 없이 이야기하고, 또 이를 위한 도전을 행하는 모습 가운데, 한국 학생들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조용히 필기를 열심히 하고, 시험준비나 시험에의 합격 여부 등에 함몰되어 있다. 한국학생들이 이러한 모습말고, “내 꿈은 이거야!”, “나는 이렇게 살아갈래!”라고 말 하는 것에 대해 주저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왜 우리의 아이들은 ‘왜(Why)?’라는 근본적 질문을 하지 못하고, 어떤 도전 가운데 닥쳐오는 두려움 앞에서 ‘왜 안돼(Why NOT)?’라고 하며 호연지기를 갖거나, 구조적 문제점들에 대해 문제제기 조차 하지 못할까?
이러한 모습 앞에서 우리의 리더 그리고 우리의 부모들, 그리고 우리 사회의 모두가 마치 헤르만 헷세의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의 주인공 한스를 마침 내 절망적 판단을 하도록 하게 한 주범과 같은 위치에 있지는 않는지 심각히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우리 국가의 리더십들이 또 우리의 정부가 “국가의 교육은 왜 존재하는가?”, “국가 교육의 본질은 무엇인가?” 라는 ‘존재론적(ontological) 질문’을 정말이지 엄정하게 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교육 정책이 수시로 바뀌는 이유는, 바로 이 국가교육의 ‘존재론적 질문’을 충실히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본질’은 오간데 없고, ‘시류’만 난무하여, 상황과 분위기에 따라 ‘시류’만 열심히 쫓는 과정이 반복되고 있다.
국가교육이 질적 수준을 제고하기 시작한 것을 90년대 부터 라고 간주해보자. 90년대 이후 학교교육과정을 거치고 난 세대(대략 75년대생 이후 세대, 대략 40세 미만 세대)는 그 이전의 세대 보다 훨씬 우수한 세대이다. 이들은 시험 성적도 더 우수하고, 외국어 구사 능력도 훨씬 뛰어나며, 알고 있는 일반 상식의 지식 수준도 더 뛰어나다.
그러나, 이들 세대가 그 이전의 세대 보다 ‘더 창의적이고, 더 도전적이며, 삶에 대해 더 낙관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해 보면,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으로 파악 될 것이다.
이들 세대들에게는 또 지금의 청소년기를 거치고 있는 세대들에게는 2가지 큰 짐이 있다. 마치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수레바퀴’가 상징하는 의미 처럼, 우리의 청년들과 청소년들을 짓 누르고 있는 큰 짐이 있다.
그 첫째는 ‘헬리콥터 맘’이라고 대변 되듯, 우리의 부모 자신들 이다. ‘막상 인생을 살아 보니’, 명문 대학에 진학하고, ‘전문직’으로 활동하거나, ‘고위 공무원’이 되거나, ‘안정적인 직장’에 자리 잡는 방법이 확률적으로 ‘최선의 삶’이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위에 소개한 3개 정도외에는 달리 다른 선택지가 없다. 물론, 부모 스스로가 상당한 경제력을 지니고 있다면, 위의 3가지 선택지는 그저 ‘단순한 옵션’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우리의 아이들은, 자신의 재능은 무엇인지, 무엇을 갈망하고 또 열망하는지, 어떤 삶을 살고 싶고, 또 이를 위해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고민과 물음은 묵살 당한 채, 거리의 횡단보도를 건너면서도 영어 단어를 외우고, 또 시험 요약 노트를 외워야 하는 현실 가운데 있다.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 가운데서 ‘헬리콥터 맘’만 가지고 문제를 삼을 수 없는 실정이다. 어쨌든 우리의 부모들은 현실적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역할이 ‘헬리콥터 맘’이 되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두번째 드리운 짐은, “꼰대”와 같은 우리 사회의 자화상 이다. 전쟁과 산업화 그리고 민주화 과정에서 많은 희생과 헌신을 해 온 우리의 어르신 세대. 그리고 이 세대의 국가 리더십 위치에 있는 분들 또는 최근까지 국가 리더십 위치를 역임 하셨던 분들이 갖는 ‘전체주의적 사고’와 ‘직계 가족 중심 가치 승계’의 구조적 모순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하라면 하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어!” 아마도, 현재 4-50대 세대들이 직장생활을 하거나 사회생활을 할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내용들일 것이다. 4050세대 역시 이를 ‘유산’으로 잘 물려 받아 30대 세대들과 1-20대 우리의 자녀들에게 똑 같이 행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현 6-70대 어르신 세대의 국가 리더십들은 ‘전체주의적 사고’가 사회의 ‘지배적 논리’로 자리 잡도록 상당한 기여를 하신 분들이다. 또한 이분들은 ‘우리의 미래세대를 위해 어떻게 길을 열어 줄 것인가!’, ‘더불어 모두 함께 성장하고 또 성공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와 같은 담론으로 고민을 하고, 또 이를 위한 제반 실행의 과정에서 역할을 하기 보다, 대대손손 자신들이 한국사회에서 이미 손에 쥔 기득권들을 ‘직계 가족의 범주’ 내에서만 ‘계승(?)’될 수 있도록 하는데 노력하며, 필요한 노하우와 네트워크를 공유하는데 골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물론 일부 소수의 ‘깨어 있는 리더십’들은 정말이지 다음세대와 미래세대를 위한 ‘길을 여는 일’에 헌신하지만, 대부분의 기존 국가리더십의 모습은 우리가 기대하고 또 갈망하는 것과는 상당한 거리감을 보이고 있다. 결국, 이런 ‘직계 가족의 범주 중심 가치 승계 시스템’은, ‘전체주의적 사고’가 사회의 ‘지배적 논리’로 자리잡은 흐름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우리의 청년들은, ‘헬리콥터 맘’과 ‘기득권으로 이미 기울어진 전체주의적 사회 시스템’이라는 여전히 무거운 두개의 수레바퀴를 지탱하고 있다. 그 무게가 얼마나 얼마나 무겁고 힘겨울까? 이 두개의 수레바퀴에 짓눌린 우리의 청년들과 청소년들은, 사회에 나와서 마저도, 또 기업이나 직장생활 가운데 마져도 여전히 그 무게감의 범주에 묶여 있다. 특히 우리의 기업들이 ‘창조적 혁신’이 정말이지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 두개의 수레바퀴의 잔재들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게 때문이다.
너무도 지나치게 내몰리다 길가에 쓰러진 어린 말은, 이제 더는 쓸모 없는 존재로 전락했다.
-헤르만 헷세의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
‘4차 산업혁명’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이 ‘트렌디 한 용어’에 열광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해외에서는 ‘4차 산업혁명’이라고 이야기 하면, ‘그게 뭐야?’라는 반응 부터 나온다. 우리 보다 기술 선진국이라고 하는 미국도 유럽도 마찬가지다. ‘본질’은 없고, ‘시류’만 난무한 모습이다.
‘4차 산업혁명’을 파생시킨 ‘세계경제포럼(WEF)’에서 ‘아이들에게 코딩교육 하는 것은 좀 잊어 버리고, 우리의 아이들이 꿈을 꾸고 또 그 꿈을 이루어 가는 방법을 교육하라!’라고 이야기 한다. 우리가 ‘열광적으로 따라하는 대상’이 된 WEF에서 한 표현이니, 이것도 제발 ‘열광적으로 따라하기’ 흐름에 적용될 수 있기를 간절히 고대 한다.
WEF에서도 언급하듯이, 우리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늘 강하게 인식하다 보니, 현재의 트렌드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트렌드가 아무리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불변의 사항이 있다. 그것이 바로 ‘본질’이라는 것이다. 비즈니스에도 ‘본질’이라는 것이 있고, 당연히 교육에도 불변하는 ‘본질’이 있다.
국가 교육의 본질 중 매우 중요한 키워드 2개가 있다. 그 첫째는 ‘사람의 무한 잠재력(unlimited human potentials)’이고, 두번째는 ‘자기고용 가능성(self-employability)’이다.
우리의 교육은 매우 많은 경우, 우리의 아이들 각자가 지닌 재능과 구체적 잠재력의 범주 그리고 그 크기 등에 무관심하다.
* 머니투데이(2012.09.17) ‘학년별 공부하는 이유’ 화제 “격하게 공감간다”
실제 공립 중학교(서울시에서 특목고를 많이 보내는 중학교 상위 20위에 이름을 올리는 소위 좋은 중학교라고 하는 곳)에 다니는 딸 아이의 학교를 방문해서 담임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고 돌아오면서, 30여년 전 중학생일 때 지녔던 학교의 모습과 다를 바 없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특별히 기계적이고 사무적으로 대하는 담임선생님의 아이를 관찰하고 설명해 주는 모습. 이런 학교의 분위기와 교사들의 모습 가운데, ‘과연 내 딸아이를 대한민국에서 교육 받도록 해야 하는 것인가?’라는 분노에 가까운 마음이 들었다. 대학을 간다고 하더라도 크게 달라질까? 직접 대학에 몸 담고 있는 입장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라고 이야기 하지 못하겠다. 한국의 아이들이 고등학교에서 받는 진로상담의 대부분은 ‘대학진학을 위한 방법론’에 그친다. 대학에 오고 나서는, ‘취업을 위한 진로상담’ 수준에 그친다.
우리의 청소년들은, 그리고 우리의 청년들은 정규 교육과정에서 단 한번도 진지하게 ‘나의 꿈, 나의 삶’에 대해 깊이 탐색하고, 고찰해보고, 또 이를 위한 작은 실험이나 시도를 해보고 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 성인이 되고 또 사회라는 곳으로 ‘배출’ 되어 진다. 그리고 ‘어쩌다 어른’이 되는 흐름이다. 부분적으로 시도는 있었으나, 그 시도들은 분절적이고, 또 이벤트성에 그치는 것이지 우리의 교육의 근간이 사람이 지닌 잠재력이 ‘무한함’을 전제로 하고, 이를 극대화 하기 위한 체계적이고 과학적 접근을 해 보지 못했다. 산업화 과정에서 ‘학교’가 태동한 것 처럼, ‘일터’에서 쓰임받기 위해 필요한 일련의 기초 지식을 주입식으로 강제 당한 것이다. 산업화 시대에는 이것이 주류 흐름인 관계로 너무나 당연하고 또 최적화 된 인재 양성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시대는 이제 도도히 바뀌어, ‘꿈과 끼’로 대변 되는 각자가 지닌 재능을 찾고, 이 재능을 기초로 자신의 잠재력을 극대화 하지 않고서는 어떤 영역이건 생존하기 쉽지 않은 환경으로 빠르게 변화되고 있다. 한국 기업들이 기존에 ‘원가 경쟁력’을 기초로 한 ‘수출’ 방식으로 성장하고 생존해 오다가, 이 영역을 중국과 동남아 등의 국가에 넘겨주고, 이제 주요 선진국 배경의 기업들과 ‘창의적 혁신의 싸움’에서 버거워 하는 흐름 역시 변화된 시대의 모습을 보여 주는 중요한 단면이다.
우리의 아이들을 ‘꽃으로도 때리지 말며’, 어떤 재난 가운데에서도 보호해야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갖는 존엄함의 기초위에 한 사람 한 사람이 갖는 ‘무한 잠재력’이라는 귀한 가치가 더 해지기 때문이다.
학교 시스템에 의해서, 교육자에 의해서, 사회의 구조적 제약으로 인해서, 우리의 아이들을 ‘획일화’ 시키고, 미리 그 가능성을 ‘재단’하는 교육과 우리는 이제 완전한 이별을 선포 해야 한다. 적어도 국가의 공교육 시스템이 자신의 배경과 처지에 관계 없이, 각자가 지닌 재능을 발견하게 하고, 잠재력을 무한히 실현 할 수 있는 토대 정도는 굳건하게 마련해주어야 한다.
우리의 공교육이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자기고용 가능성’이다. 이미 미국과 영국 등 주요 선진국에서는 이를 국가교육의 목적과 목표로 삼고 있다. 앞서 언급한 ‘헬리콥터 맘’들의 주된 목표는 자녀들이 ‘확률적으로 높은 안정적인 삶’을 만들어 주고자 하는데 있다. 그것이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일차적으로 명문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되니, 이에 모든 것을 거는 ‘확률의 게임’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이것이 ‘상대적으로 생산적인 투자’라는 ‘합리적 결론’인 것이다.
이 ‘불확실성’을 제거해줄 수 있는 ‘대안’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만약, 우리의 자녀들이 ‘명문대학에 진학하는 것’만이 아닌,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는 ‘확률이 높은 합리적 대안’이 있다면, 사교육에 쏟는 그 투자를 상당부분 거두어 들일 것이다.
주요 선진국에서는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을 ‘삶의 기술(life skills)’로 정의 내린다. ‘기업가정신 교육’을 ‘자기고용 가능성’을 높이는 최고의 수단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북유럽과 영미권 국가 대부분에서는 ‘필수 교육과정’으로 채택하고 있다. 우리가 ‘취업’의 대체수단으로 ‘창업’을 인식하고 행하는 것과는 본질에 대한 이해 자체가 다르다.
‘부의 대물림’에 해당하는 것을 제외한 보통의 사람들의 일생은, 이제 60세가 넘어서 까지도 경제적 활동을 행해야 하는 시대로 또한 빠르게 변화되고 있다. ‘먹고 사는 경제적 문제’를 넘어서, 우리는 각자 1) 내가 사랑하는 것, 2)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 3)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세상에 유익이 되는 것)을 기초로 경제활동을 행할 수 있는 최적 교차점(the golden zone™)을 찾고 이를 현실화 시키는 삶이라면, ‘행복하고 안정적인 삶’의 기초 여건을 충분히 갖출 수 있을 것이다. 이 최적 교차점을 찾고 현실화 시킨 사람은 자연스레 ‘자기고용 가능성’이 담보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기업가정신 교육’의 방점은, ‘자기주도적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데 궁극의 목표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는 ‘자기고용 가능성’이 전제가 되어야, ‘자기주도적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관점이나 철학을 분명히 하면(perspective level), 어떤 일을 행할 때 원칙이 바로 서게 된다(principle level). 그리고 그 원칙은 어떤 일을 실행 할 때 충실한 가이드 기능을 제공한다(practice level).
우리의 교육이 이제 철학 자체를 달리 해야한다. 산업화 시대에 ‘순응하기 위한 사람’을 양성하는 관점에서, 각자가 지닌 ‘재능을 발견’하고, ‘잠재력을 무한히 발현’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으로 그 교육의 철학과 지향점을 달리 해야 한다. ‘대학’을 진학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사회생활을 하고, 또한 자신의 꿈과 미래를 스스로 계획하고 또 실현시켜 나갈 수 있도록 우리의 교육 시스템을 개혁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의 기반아래 우리의 공교육 체제와 교육과정에 일대 대변혁이 일어나야 한다.
- 만 6세 부터 공교육과정이 시작되어야 한다. 유치원 과정이 공교육에 편입이 되어야 한다.
- 만 6세 부터 고등학교 과정까지 ‘의무교육’으로 행해야 한다.
- 초등학교 4학년, 중학교 1학년과 고등학교 1학년은 ‘진로 및 직업 교육(vocational education)’으로 행해야 한다. 특별히 고등학교 과정의 Vocational Education은 국제적으로 행해야 한다. 이를 위해 본 교육 역시 정규 교육과정으로 편성하고, 전문적 교사의 배치 등이 공식화 되도록 해야 한다. 이미 유럽에서는 행하고 있는 내용들이다. 이 교육과정에 ‘기업가정신’ 교육도 필수적으로 반영해야 한다.
- 고등학교 과정까지 마치게 되면, 보통의 사회생활을 충실히 해나갈 수 있도록, 고등학교 교육과정까지가 기초교양교과목 까지를 담아 충실한 교육이 될 수 있도록 내실화를 기해야 한다. 또한 고등학교 교육과정은 대학에서와 같이 부분적으로 ‘선택교과목제’를 반영해야 한다.
- 전국에 산재한 ‘코리아텍’과 ‘한국산업기술대’ 및 ‘한국기술교육대’를 일괄 통합하여, ‘전문학사-학사-전문석사-전문박사’까지 무료로 양성할 수 있는, ‘국립 한국과학기술대학교(코리아텍 뉴 버전)’을 전국적 캠퍼스로 운영하고, 이의 수준을 독일의 기술교육 전문기관 수준으로 고도화 시켜야 한다. ‘고교 졸업 후 입학’이라는 개념이 아닌, 생애 전 주기에서 언제든, 어느 지역에서든 입학하여 필요한 기술교육을 세계적 수준으로 받고 또 학위 또한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전국 국립대학에 ‘자유교양대학’을 설치하고, ‘학점은행제’로 학사학위 과정을 이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자유교양대학’ 역시 일반적 단과대학과 동일하게 교원 및 시설을 지닐 수 있도록 해서 ‘일과 학업’이 언제든 병행 가능한 구조가 되어야 한다.
- 전국 국립대학에 ‘기업가센터’를 설치하고, 1년 과정의 창업 준비 프로그램을 실효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이 1년간의 창업준비과정에 등록할 시, 직장인들은(고용보험 납입자), ‘실업급여’를 대체하는 개념인, ‘창업준비급여’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급여의 중간값 수준의 80% 수준을 1년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고용보험 미가입자인 학생이나 청년들의 경우, 공무원 초임의 80% 수준을 1년간 ‘창업준비급여’로 수령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1년 정도의 시간이면, 충실한 창업 준비과정을 가질 수 있다. 이 프로그램을 최소 2회 까지는 행할 수 있어야 한다. 즉, 한번의 창업에 실패한 사람이 다시 재도전을 할 수 있는 기회 역시 보장되어야 한다.
상기한 사항 이외에도 우리가 변혁해야 할 사항들은 한두가지가 아니다(창업이나 기업생태계 관련 사항은 별도로 다루기로 한다.).
이를 위한 예산도 제법 소요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도 교육 예산 중 불필요하거나 중복되거나 또는 비합목적적 예산들을 다시금 점검하게 되면 소요되는 예산의 규모를 최적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추가로 투자되어야 할 예산은, 국가적 측면에서 그 어떤 항목 보다 투자대비 효과(ROI)가 큰 영역이다.
우리의 청년들을, 또 우리의 미래세대를 꿈 꾸게 하는 것. 이것 만큼 국가가 행해야 할 귀하고 가치있는 것이 또 무엇이던가!
[5-5-2]와 같은 학제 시스템의 개편, ‘사교육 없는 교육’ 등과 같은 ‘교육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충실한 고찰과 탐색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교육개혁은 그 지속가능성이 담보되지 않아, 상황 변화에 따라 또 다시 ‘전면 백지화’ 또는 ‘타이틀 변경’과 같은 표류하는 흐름이 만들어 질 개연성이 매우 높다.
지금 여기서 맥이 풀려 버리면 안된다. 그러다가 수레바퀴 아래에 깔려 끝장날 수 있어.
-헤르만 헷세, ‘수레바퀴 아래서’
이제, 우리는 또 국가는, 우리의 청년들과 우리의 미래세대들이 ‘수레바퀴 아래에 깔려 끝장날 수 있는 무게’로 부터 자유롭게 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청년들과, 우리의 미래세대들이 꿈 꾸고, 또 그 꿈을 이루어 갈 수 있도록 그 기초 여건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이것이, 기성세대와 또 국가에게 주어진 가장 본질적 책무이다!